[중학교 3학년 역사] 흥선대원군의 정치

2021. 3. 30. 20:19중등교육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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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정치

고종이 어린나위로 즉위하자, 대신하여 정치를 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았을때, 주변국들은 외세의 개항 요구에 강제적으로 개항되었고, 내부에서는 이전 세도 정치로 인하여 백성들이 봉기를 이르켰다.

흥선대원군은 내부 사정에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백성의 원망 해결 및 제정 상태 복구

백성들을 달래기 위해 지방민이 직접 운영하는 사창제를 만들어 환곡 문제를 해결하였다.

불안정한 제정을 위해 땅을 다시 조사(양전사업)하고,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었다.

그 외로 비변사를 없애고 의정부를 다시 돌아가도록하게 했으며 대전회통으로 통치 규범을 재정비했다.

서원을 철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양반들에게 원납전을 강제로 가져갔고 당백전으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그 이유는 정치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경복궁을 재건한 것이다.

 

외세의 침략과 눈치

흥선대원군은 국내 양반들의 눈치를 봐가면서 정치를 했다.

 

러시아는 틈만 보이면 남하하여 조선을 먹을 생각을 했었다. 흥선대원군은 이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를 끌어들였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다.

조선 내부에서 양반들은 천주교 금지를 외쳤는데, 흥선대원군은 이것을 달래기 위해(자신의 정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병인박해한다.(프랑스 선교사 처형)

이를 계기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프랑스는 강화도를 점령하였으나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물리쳤다. 이때, 외규장각에 있었던 도서와 보물이 약탈당했다.

그 이후, 독일인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선 내부의 서양에 대한 분노는 커져갔다.

시간이 흘러 과거 제네럴 셔먼호 사건(대동강에 들어왔다가 배가 불에탄 사건)을 이유로 신미양요, 미국이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이때, 어재연이 싸웠지만 졌고, 이후 미국군은 물러났다.

 

이후, 내부 정세를 고려한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수교거부를 선포했다. 이것은 근대화를 늦추었다.

 

시간순서

1. 병인박해 (병인양요 이유) 1866년 1월

2. 제너럴 셔먼호 (신미양요 이유) 1866년 7월

3. 병인양요 1866년

4.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 사건 1868년

5. 신미양요 1871년 

6. 척화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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