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역사] 고종의 정치와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2021. 3. 31. 22:28중등교육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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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았고, 10년이 지난 1873년에 고종이 정치를 시작한다.
고종은 자신의 뜻을 다른 양반들에게 굽히지 않고, 흥선대원군과 다르게 불평등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개항을 하였는데, 한 년도에 연쇄적인 사건이 일어나니 유심히 보아야한다.
1875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 1년이 지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게된다.
강화도 조약치외법권, 해안 측량권, 관세 불가, 곡류 무제한 수출 허용이 주된 내용이다.
앞으로 일어나는 다른 조약들은 모두 근대적 조약임과 동시에 불평등 조약이며,
일본과는 해안 측량권을 주고, 서양과는 최혜국 대우(가장 유리한 대우를 자동으로 그 국가에게도 함)를 하며, 공통적으로는
치외법권, 관세(강화도 조약 제외), 무제한 수출 금지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 이전 위정척사 운동이 있었다. 이 사람들(신분 = 양반)은 개항 조약이 체결될때마다, 계속 반대를 한다.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기 이전에는 서양과의 개항을 하면 안되다고 하였고, 강화도 조약 이후로는 일본과 서양은 다를게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글 뒤에서 이야기할 조미수호통상조약(미국과의 조약) 이후, 극대노하였다. 이후 일본이 조선을 점령했을때는 항일 운동을 하였다.

어쨌든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한지 7년후, 조선에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책략이라는 청, 일본, 미국과 잘 줄타기를 해야한다는 책이 넘어왔다. 고종도 인정했고, 통상 개화론자들(신분 = 양반)이 힘을 얻었다. (힘을 얻었음으로, 정치를 하게된다)

1876~82년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고종의 개화정책 추진으로써,
일본에 수신사, 조사 시찰단
청에 영선사 + 유학생
미국에 보빙 사절단
새로운 정책기구로 통리기무아문(두글자씩 띄운다)이 국정을 총괄하고, 청에서 배운 무기(영선사)를 만들기 위해 기기창을 설치, 그리고 일본인 교관을 둔 근대식 군대를 만들었다. 이것을 별기군이라고 한다.

1882년, 강화도 조약이 큰 문제가 있어서 일본과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했다. 무제한 수출을 막고, 관세를 매겼다. 해안 측량권은 유지된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그 이유는 별기군과 구식군 사이 차별때문이다.
이때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정부 고관의 집을 습격했다. 이후, 구식군의 추대를 받아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였고 통리기무아문, 별기군이 폐지되었다.
이후, 청은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톈진에 3년간 가두었고, 일본은 배상금을 물었다. 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맺었다.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은 개항장 이외의 내륙에서도 거래를 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개화론자들은 청에 붙는 온건 개화파와 일본에 붙는 급진 개화파로 나누어졌다.

1876 + 7 = 1883년, 흥선대원군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우호적 관계를 맺는 것이며, 최혜국 대우를 했다.

그 외에도 같은 83년도, 영국과도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고, 러시아와는 84년도, 갑신정변 일어나기전에 맺었다. 이후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거문도 사건(85년)이 일어난 계기가 된다.(러시아 견제 위한 영국의 점령)

고종의 이러한 조약들로 조선은 불리하게 서양열강과 일본, 청에 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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