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1882년 임오군란과 1996년 아관파천까지 역사의 흐름 모음집

2021. 4. 7. 21:22중등교육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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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하고 갑오개혁하고 청일전쟁하는데 동학 농민 운동 또 일어나고 곧 이어 갑오개혁 또 하고 을미사변 일어나고 을미의병 일어나고 아관파천이 일어나는데...

 

청일 전쟁의 이유와 그 원인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갑신정변을 끝으로 생겨난 조약을 알아야하며, 갑오개혁 내용을 조금 알려면 갑신정변의 주된 개혁안에 대해 알아야 한다.

 

임오군란에 대한 설명

1882년, 이전 별기군의 창설에 이어 구식군의 대우가 나빠졌다. 그리고 1882년 구식군의 폭동이 일어난 것 이다.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다.

그 이후,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며 톈진으로 흥선대원군은 납치당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마자 바로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폐지하긴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의 간섭이 더 심해졌고,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과,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고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기 시작했다.(공사관에)

 

갑신정변의 시작과 끝

1884년, 청의 군대가 청불전쟁으로 조금 빠져나가자 일본의 지원을 받고(받았으나, 청이 다시 개입하며 취소되었다) 급진개화파가 우정총국개국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을 이르켰다.

갑신정변 주요 개혁안(개혁정강)은 아래와 같다.

1. 사대 폐지

2. 문벌 폐지

3. 인민 평등

4. 조세 제도 개혁

3일만에 청이 와서 뒤집었다. 아무에게서도 지지를 받지 못했으나 근대 국가를 위한 조선 최초 정치 개혁 운동이다.

심각한건, 임오군란 이후 간섭이 심해졌는데, 더 심해졌다.

이때 한성 조약을 맺고 일본은 배상금을 타갔고, 일본과 청은 톈진 조약으로 앞으로 군대를 보낼때 서로 알리기로 하였다. 그 이후 일본군과 청군은 철수했다.

 

갑신정변 이후 러시아와의 관계, 중립화

청의 내정간섭을 막기 위해 러시아에 접근하였으나, 영국이 거문도 사건(거문도 점령 사건)을 이르키며 러시아를 견제하였다. 그 이후 조선은 열강 사이 대립이 치열해졌다.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청나라)

부들러와 유길준의 조선 중립화는 실현되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사건은 앞으로 일어날 갑오개혁 이전 1차 동학 농민 운동 이후, 일본과 청의 대립과 전쟁의 이유를 제공한다.

먼저, 임오군란 이후로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가능해졌다.

그리고, 갑신정변 이후 톈진조약으로 청-일 군대는 서로의 배치 사실을 알려야했다. 곧, 한쪽 군대가 배치되면 다른 나라 군대도 주둔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갑신정변 개혁 정강은 갑오개혁 내용과 유사하다. 이러한 대부분의 개혁 내용들은 보통 조세 제도 개혁과 평등, 신분제 폐지(과거 폐지)의 이야기들이다.

 

아무래도 외울때 포인트는 아래와 같다.

임오군란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제물포 조약, 일본 군대 공사관 주둔이고, 그 외 한성, 톈진은 갑신정변 이후다.

 

1894년 제 1차 동학 농민 운동은, 그 이전 일어난 고부 농민 운동이 탄압받아서 일어난 농민 봉기이다.

사실 고부 농민 봉기 이전부터, 교조 신원 운동으로 동학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운동이 있었는데 이건 90년대까지도 가니까 뒤에서 말할 필요는 없다.

 

1차 동학 농민 운동은 전주성 점령으로, 전주 화약을 맺고 봉기를 중단했다. 이때 청과 일본이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그 이후 정부에선 교정청, 봉기군은 집강소를 만들어서 개혁안을 실행시켜갔다.

한번에 한 것은 아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게 되었고, 청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1894년 1차 갑오 개혁

청일 전쟁 이틀 후, 제 1차 갑오개혁이 일어났었다. 정확히 제 2차 갑오개혁 이전까지 이어져갔다.

이때 김홍집을 중심으로 군국 기무처 설치, 연호 폐지, 왕권 제한, 과거제 폐지, 세금낼때 화폐 사용, 탁지아문 설치, 신분제 폐지, 과부 재혼 허용을 하는 등 제 1차 갑오개혁을 하였다.

일본이 전쟁하는데 힘을 쏟음으로써 1차 갑오개혁은 조선에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1894년 제 2차 동학 농민 운동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제 2차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항일 운동이였으나, 위정척사파가 아닌 농민들이였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모두 흩어졌다.

1894년 2차 갑오개혁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자, 일본을 다시 주도로, 제 2차 갑오개혁이 일어났다.

김홍집과 박영호의 연립 내각이였으며, 군국기무처를 폐지하였다.

 

그 이후 2차 갑오개혁 도중, 고종은 홍범 14조를 선포하고 사법권과 행정권을 분리하였고, 제 1차 갑오개혁때 없앤 과거를 보완하기 위해서 교육 입국 조서를 만들었다. 근대 교육 제도, 새 지방제도, 행정권과 사법권의 분리가 담겨 있다.

1895년 청일전쟁의 끝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요동반도를 일본이 얻었지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간섭으로 인해서 요동반도를 일본은 청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3국간섭으로 일본의 위상은 조선에서 떨어져가고 있었다.

1895년 친러세력 강세

친러세력을 곁에 두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이르켰다. 그 이후 제 3차 갑오개혁, 즉 을미개혁이 일어났다.

우편업무를 개시하고, 단발령과 종두법을 시행했다. 이것으로 인해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나, 바로 해산되었다. 이들은 양반들이였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은 해체되어지고, 을미개혁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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