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페르시아의 시작과 멸망과 또 다른 시작

2020. 12. 13. 20:25중등교육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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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페르시아인들은 대게 중개 무역으로 큰 돈을 벌었고 정복활동으로 새로운 땅과 노예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관용 정책으로, 공용어인 페르시아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도 페르시아의 법(납세와 국방)만 잘 따르면 아무런 문제가없게 해두었습니다. 모든 왕조의 페르시아는 이렇습니다. 

정책

20개 주에 총독 파견, 왕의 귀와 눈을 파견하여 감시를 하였습니다.

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교는 아후라 마즈다를 유일신으로 둔 일신교이고 세상이 선과 악의 대립으로 균형을 맞춘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다른 선/악의 배경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서 성장했으며,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서 국교로 인정되었습니다.

마니교 - 조로아스터교 + 크리스트교 + 불교의 혼합교 - 사산왕조에서 유행하였습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전성기를 이끈 왕 : 다리우스 1세

페르시아 전쟁 (아테네와의 전쟁) - 마라톤 전투, 살라미스 해전(크세르크세스)

많은 영토를 차지했던 페르시아였던 만큼, 동서문화 융합을 했습니다. 관용정책 덕분에 교류도 활발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당합니다. 헬레니즘 문화의 요소 중 하나 입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

알렉산드리아 제국의 분열 후 생긴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에서, 파르티아는 이 사산왕조 페르시아에 먹히게 됩니다. 박트리아는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였는데, 후에 쿠샨왕조에 흡수됩니다. 그래서 이곳의 대승불교가 불상을 제작한 것이죠. (그리스 문화는 신을 인간 처럼 생각했습니다. 쿠샨 왕조 이후 석가모니는 신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파르티아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처했습니다. 

어쨌거나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비잔티움(동로마)와 경쟁하듯 부강해졌습니다.

이렇게 비잔티움과 전쟁하니 기존의 무역로는 끊겨버리고 상인들은 바닷길을 개척했습니다. 그래서 사산왕조는 더이상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상인들이 거치는 바닷길 근처 나라들 (이집트 등..)은 부유해졌습니다.

장기적으로 쇠약해진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이슬람세력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동로마 또한 이슬람 세력에 의하여 멸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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